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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로드


멀리 떨어진 대륙으로 구분되어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두 문명이 만났다. 우월한 군사력과 발달된 무기를 가진 한 쪽 문명에 의해 오랜 동안 나름대로의 문화를 유지했던 다른 쪽의 문명은 멸망을 당했다. 침략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곳을 “신대륙”이라 불렀고, 피침략자는 그 땅의 주인인 “사람”이 아니라 “인디오”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존재가 정의되어야만 했다. 인디오들은 그들의 문화를 말살당하고 자원을 약탈당했다. 구대륙의 언어, 종교, 생활 양식이 도입되고 강요되면서 “사람”의 문화는 그렇게 사라졌다. 침략자들은 인디오의 땅에서 발견한 것들을 실어 날랐다. 금, 은... 이런 희귀 자원과 함께 고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담배... 이런 것들이 구대륙으로 도입되었다.구대륙에 처음 도입된 고추는 하바네로처럼 모두 맵기만 한 것이었을까?자생지에서 발견되는 후추 크기의 야생 고추는 강력한 매운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야생 고추를 작물로 만드는 오랜 재배 과정에서 유전자 변이를 통해 맵지 않은 고추 품종이 분리되었을 것으로 저자는 추측하고 있다. 고추가 신대륙 발견 이전에 다변화되었다는 것은 16세기 중남미를 여행했던 아코스타 신부는 기록을 통해 뒷받침된다.“아히(고추)는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을 지닌다. 카리베라는 이름의 강렬한 맛을 지닌 것이 있는데 자극이 강해 얼얼한 느낌이 든다. 맵지 않고 단맛이 나서 입에 한가득 놓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작아서 입안에 넣으면 사향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있는데 맛이 매우 좋다”야마모토 노리오의 “페퍼로드 – 고추가 일으킨 식탁 혁명”은 이처럼 신대륙에 자생하는 야생 고추의 생태에서 시작을 해서 고추의 구대륙 전파 경로를 따라 가며 고추에 얽힌 여러 나라의 민속과 음식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고추에 대한 탐구는 학생 신분으로 참여한 안데스 재래식물 조사대에서 엄청나게 매운 야생종 고추를 경험하며 시작되었고, “고추의 기원과 재배화”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고추의 농식물학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민속학으로 전향을 해서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와중에도 저자의 고추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어 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50여년에 걸친 저자의 고추에 대한 인연을 그렇게 정리한 결과이다.1493년 스페인에 최초로 도입된 이후, 값비싼 후추를 대신해서 어디서나 쉽게 재배할 수 있는 새로운 향신료로 인지된 고추는 16~17세기를 거치며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등의 음식 문화에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에 추가적인 품종 개량을 거치면서 헝가리에서는 파프리카가 탄생하였다. 신대륙에서의 설탕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하는 노예 무역이 성행하면서, 16세기 초반에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고추가 전래되었다. 매운 향신료를 이미 사용하고 있던 서아프리카 지역과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등에서 고추는 기존 향신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인도에 고추가 전래된 것은 희망봉 항로가 개척된 16세기 초반이었고, 후추, 생강 등으로 매운 맛을 내던 기존 향신료에 고추가 추가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맛살라가 완성되었다. 이후 네팔, 부탄 등으로 확산되어 17세기에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재배가 시작되었다. 일본을 거쳐 한반도로 전래된 고추는 백김치 문화와 결합이 되어 식욕을 돋우는 빨간 김치로 발전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우동의 양념으로 쓰이게 되었고, 중국에서는 쓰촨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남 지방의 음식 문화에 매운 맛과 풍미를 더하게 된다.세계농업기구(FAO)의 2012년 고추생산량 조사를 보면(책 113쪽), 약 130만톤을 생산하는 인도가 약 40만톤인 2위의 중국을 압도하면서, 페루,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태국, 미얀마, 에티오피아, 가나, 베트남의 순서로 생산량이 나열된다. 페루를 제외한 다른 나라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책의 조곤조곤 읽어 보면, 고추 전래 이전부터 매운 향신료를 즐겨먹던 문화권에 속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후추, 산초, 마늘처럼 매운 향신료가 사용되던 문화권에 전래된 고추는 기존 향신료를 보완하면서 음식 문화를 다양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고추가 널리 쓰이는 한반도와 중국 서남부에서 고추 전래 이전에 산초가 서민의 중요한 향신료였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빨간 고추장에 파란 풋고추를 찍어 먹는 그런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있지 않을까? 책을 읽은 느낌을 정리하자면, 고추의 야생종과 품종 개량을 다루는 1장과 2장은 저자의 박사 논문을 토대로 잡초에서 작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지만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로 고추의 전파 경로를 따라 민속학적 관점에서 각 지역의 음식 문화와 고추의 결합을 설명하는 나머지 부분은 흥미롭게 읽힐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상당 부분이 식물학이나 민족학 분야에서 저자가 경험하고 연구한 것을 토대로 글을 썼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을 소개한 일부분에서는 다소 산만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고추가 일으킨 음식 문화의 혁명을 공감하고 싶은 분들께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마치 처음부터 한글로 쓰여졌다고 착각할 정도로 매끄러운 번역을 한 옮긴이 최용우의 글솜씨를 칭찬해 주고 싶다. (참고) 이 서평은 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부흥의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맛이라면 단연 매운맛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매운맛을 내는 대표적 재료인 고추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기껏해야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 ‘김치에 고추가 쓰인 지는 불과 250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도가 전부다. 이 책은 고추의 식물학적 특성부터 고추가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각국의 식문화에 일으킨 커다란 변화에 이르기까지 고추를 하나의 식물이자 문화로서 종합적으로 접근한 본격 고추 입문서이다. 또한 고추의 원산지인 중남미에서 출발해 지구를 오른쪽으로 돌며 유럽,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고추가 전파된 길, 즉 페퍼 로드pepper road를 따라가며 각국의 음식문화를 만나는 흥미로운 여행기이기도 하다. 저자 야마모토 노리오는 대학 시절 안데스 지대를 답사하다 우연히 야생 고추와 마주친 이후 50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고추와 인간의 관계를 연구해온 학자이다. 그 오랜 집념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걸은 길의 흙냄새와 눈을 질끈 감고 맛본 고추 요리들의 매콤한 향이 한껏 배어 있다.

추천의 글 5
들어가며 12

1장 고추의 ‘발견’
고추와 콜럼버스 20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작물 26
다양한 만큼 분류하기 어려운 고추의 품종 30
알려지지 않은 고추 34
잡초와 다름없는 조상 야생종 40
고추는 왜 매울까 42
매운맛을 내는 요소 45

2장 야생종에서 재배종으로 - 중남미
야생종과 재배종의 차이 50
열매의 탈락성이야말로 야생종의 특징 55
고추 야생종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59
고추는 어떻게 재배화되었을까 66

3장 후추에서 고추로 - 유럽
경계해야 할 식물 72
이탈리아의 고추아카데미 77
칼라브리아의 명물인 고추 요리 81
파프리카의 고향 - 헝가리 84
파프리카 박물관 88
노벨상을 배출한 파프리카 91
맵지 않은 파프리카가 나오기까지 94
헝가리의 대표 요리, 구야시 96

4장 노예제가 바꿔놓은 식문화 - 아프리카
포르투갈인의 공헌 102
사탕수수와 노예제 104
노예무역을 통해 고추도 이동했을까 107
멜레구에타 페퍼를 대체한 고추 109
고추가 들어간 커피를 즐기는 에티오피아인들 112
나이지리아의 엄청나게 매운 요리 117

5장 고추 없는 요리라니 - 남아시아?동남아시아
향신료 왕국 - 인도 122
카레 이야기 124
빨갛게 물든 대지 - 네팔 132
진정한 고추 마니아 - 부탄 138
고추로 만든 소스, 삼발 - 인도네시아 142

6장 고추의 ‘핫 스팟’ - 중국
마파두부와 두반장 148
중국의 고추 사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151
고추가 중국에 이르기까지 154
고추를 좋아하는 티베트인 156
티베트인의 고추 요리 158
중국에도 야생 고추가 있을까 163

7장 고추의 혁명 - 한국
고추에 독이 있다? 168
김치를 꽃피운 한반도의 육식문화 171
고추에 관한 민간신앙 174
김장 체험 177
김치 냉장고 181
고추의 혁명 185

8장 점점 더 매운맛으로 - 일본
시치미고추 188
빨간 잠자리와 고추 191
다양한 품종 193
약에서 음식으로 196
고추 상인의 등장 198
문명개화와 고추 200
에스닉 요리 붐 204

9장 고추의 매력
도취와 쾌락의 맛 210
부패 방지 212

후기 215
참고문헌 219